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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소망교회를 찾아서
- 1인교회로 개척해 25명 예배공동체가 되다
- 박근식 목사, “지극히 평범한 목회 ... 하나님께서 하셨다”
2022년 여름수련회에 함께 한 교우들(2명 빠진 전원이 참여했다)
박근식 목사
각 연회마다 비전교회가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절반에 이른다. 그런 이유로 감독선거에 후보로 나서는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비전교회 지원 방안에 대해 공약한다. 비전교회가 자립교회로 성장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같은 점을 감안할때 교회개척에 대해 고민하는 목회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더구나 개척 멤버 없이 혼자 또는 목회자 가정만으로 개척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결심이 있어야 한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기자는 교회개척을 주저하게 만드는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개척을 고민하거나 현재 개척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에게 하나의 ‘팁’을 제공하기 위해 개척교회를 찾았다. 서울남연회 송근종 총무의 추천을 받아 양천지방회 소망교회를 담임하는 박근식 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10월 13일(목) 오후 2시, 양천구 신월동 상가 3층에 자리잡은 소망교회 예배당에서 박근식 목사와 부인 이윤미 목사를 만났다. 박 목사가 소망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는 혼자 예배를 드려야 했으나 지금은 청년 위주의 25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박 목사 부부에게 개척할 당시와 그동안의 목회 과정, 지금의 상황에 대해 들었다.
■ 이름만 있던 교회로 부임(개척 동기와 과정)
박 목사는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양천지방회 은혜교회(서동원 목사)가 모교회다. 부친은 은혜교회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어린 시절부터 고 문충웅 목사의 목회를 보면서 자랐다. 8삭둥이로 태어났기에 서원기도 했던 모친이 신학대학 입학을 원했지만 자신은 세종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3학년을 마치고 군입대 했을때 대대 군종병으로 복무하도록 인도했고 군부대교회 목회자(고신측 군선교사)의 영향을 받게 하셨다. 더구나 불교신자였던 대대장이 그를 인정하여 상담병으로도 일했다. 그 모든 것이 그가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하나님의 일하심이었다.
군복무를 마친 그는 세종대학교에 복학하지 않고 26세에 다시 학력고사를 치러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 졸업 후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다. 그리고 모교회인 은혜교회에서 수련목회자로 목회자 수업을 시작했다. 과정을 마치고 개척해야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는 수련목회자 규정에 따라 개척을 위해 기도하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소개받은 곳이 소망교회다. 당시 소망교회는 이름만 살아있는 ‘식물상태’였다. 따라서 소망교회 담임자로 부임한다고 해도 개척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기도하던 박 목사는 소망교회에 부임해 개척자의 마음으로 목회를 시작했다.
그 때가 2015년 11월이었다. 어느새 만 7년이 되는 셈이다. 박 목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솔직히 ‘교회개척, 해야만 한다와 하고 싶다’의 사이를 맴도는 마음이었다.”고 고백했다. 곧 대단한 동기가 그다지 없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양천지방회 소속 구역이었지만 성도와 재정은 전혀 없는 그야말로 ‘이름 뿐인 교회’였던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시작이 가장 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박 목사는 말했다. 만약 지금 상황이라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잘 몰랐기에 ‘겁 없이’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부연했다.
■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온 청년목회
주축인 소망교회 예배 장면
“개척초기에 어머니 나이 되시는 분이 찾아오셔서 함께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비슷한 연배가 아닌 자신의 딸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이것이 청년목회의 씨앗이라고 박 목사는 들려줬다. 곧 자신은 청년목회를 위해 기도했거나 준비하지 않았고 그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일반적으로 목회했는데 하나님께서 청년들이 모이는 교회로 이끄셨다는 것이다. 곧 자신은 지극히 평범하게 목회했는데 좋은 성도들이 와서 소문난 것이라며 겸손해 했다. 소망교회는 교인들의 대부분이 20~30대로서 소위 ‘MZ세대’가 주축이다. 박 목사에게 청년들이 찾아오는 이유를 묻자 “담임목사가 젊고 어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며 멋쩍어 했다. 박 목사는 올해 만 40세로 어리다고 할 수 없는 나이지만 청년들이 자신을 형이나 오빠처럼 편하게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그래서인지 전체 출석교인들 중에서 성인은 단 2명으로, 그들은 청년들의 어머니다.
청년목회의 즐거움과 어려움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양날의 검이 아닐까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젊음’이라는 단어가 생동하는 에너지와 함께 아직 무르익지 않은 시기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이는 목회와도 곧바로 연결된다고 설명했다. 적은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활력이 넘치지만 동시에 안정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와 관계없이 시대적 상황이 청년들에게 어려운 환경이라는 점에서 더욱 고충이 깊다고 했다. 졸업과 취업, 결혼이라는 청년들의 공통된 고민이 ‘불안정함’을 뜻한다며 청년들이 대다수인 상황이기에 출석과 재정이라는 지표가 ‘들쑥날쑥’ 한다고 했다. 예배 인원은 25명이지만 재정적으로는 여전히 비전교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7년여 동안 젊은이들과 함께 목회하면서 배운 것은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아서 좋다”
25~26세인 청년들이 자신에게 해 준 말이라며 좋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목사의 정체성(identity)을 고민하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고 했다. 청년들은 ‘기도해라’, ‘지난 주일에 왜 오지 않았나’, ‘성경을 매일 읽으라’ 는 등의 말을 하면 ‘꼰대’로 생각한다고 귀띔했다. 더불어 권위를 내세우는 목사로 생각해 그 다음부터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본인이 경험한 MZ세대의 특징이라고 했다. 그래서 ‘꼰대 같은’ 말을 하지 않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이 올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런가 하면 이런 모습이 코로나 기간에도 흩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버팀목이 됐다고 했다. 자신이 소위 ‘꼰대 같은’ 목사였다면 청년들이 흩어졌을 것이라고 부연하며 실제로 청년들이 그처럼 고백했다고 전했다. 박 목사는 시종일관 청년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MZ세대의 특징을 잘 알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왜 청년들이 목회자를 신뢰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지 역발상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년들의 눈높이를 맞춰 ‘함께 가는’ 목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자신이 고백한대로 목사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고민하며 잃어버리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 특별한 프로그램 없이 예배와 식탁교제에 집중
임대해 개척한 소망교회 전경
소망교회 주보에 표기된 표어 ‘하나님나라 씨앗 되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박 목사는 보통 열매를 많이 노래하는데 자신에게는 처음부터 ‘씨앗’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왔다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아마도 성령의 인도하심이었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전형적인 대형교회를 추구하지 않았다며 ‘작지만 건강한 교회’, ‘누구나 와서 예배할 수 있는 교회’를 생각했다고 전했다. 작고, 느리고, 잘 나지 않고,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공동체를 꿈꾸며 시작했다면서 얼마나 그 기대에 부응했는지는 차치하고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는 목회자로 남고 싶다고 강조했다.
어떻게 청년목회를 해 가느냐고 묻자 소망교회는 특별한 교회가 아니라며 프로그램이 거의 없다고 했다. 흔한 전도축제도 한 적이 없다며 다만 예배드리고 난 뒤 성심껏 식탁을 준비해 나눈다고 했다. 자신들이 ‘소망식탁’이라고 부르는 이 시간에 모두가 식탁에 둘러 앉아 웃고 떠든다고 했다. ‘조건 없는 환대의 식탁이 곧 주님의 식탁’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코로나 이후에는 소그룹목회가 강조될 것이라는 기자의 제안에 그동안의 소그룹 운영에 대한 경험을 들려줬다. 인원이 많지 않아 형제&자매 소그룹으로 나눠 진행했다. 서로가 돌아가면서 각자의 (신혼)집을 오픈해서 모였다. 여기에는 담임목사도 예외가 아니다. 박 목사 부부도 모든 성도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식탁의 교제를 나눴다. 잘 먹으니 교회가 힘을 얻더라며 웃었다. 가끔은 주일에 경치 좋은 곳으로 야외예배를 가기도 했다. 이런 모습에 대해 “잘 먹고 잘 노는 교회네요. 아직 어려서, 채 일곱 살이 되지 않아 그런 것 같습니다.” 라며 겸연쩍어 했다. 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면서도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찬양팀을 꾸렸다며 은근히 자랑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걸 느낀다고 했다.
■ 비슷한 환경의 동역자들 ...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대접할 수 있어
박 목사는 서울남연회 김정석 감독을 향해 특별히 고마운 마음이 있다고 했다. 김 감독이 재임한 2년 동안 비전교회를 후원했던 ‘나세남’ 프로젝트로 인해 매월 100만 원씩 지원받았기 때문에 코로나에서 견딜 수 있었다고 전했다. 지난번 실행위원회에서 앞으로 2년 동안 연장하는 안이 통과됐지만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다며 나름대로의 대안을 찾기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연회 때마다 안수식을 보면 확실히 개척하는 목회자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며 개척을 준비하는 동료 목회자들을 향해 조언해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조심스럽게 답변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다는 뉴스를 접했다며 아마도 대부분이 작은 상가교회였을텐데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낀다고 했다. 특별히 청년목회를 고민하는 동역자를 향해서 청년들이 미전도종족으로 불리는 이유에 대해 역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하나님이 있어요?” 라고 묻는 MZ세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과정이 필수라고 부연했다. 또한 개인주의가 심화되어 있어 심방을 싫어하는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며 자신들은 “우리를 이용해라. 기도와 도움을 요청해라”는 말로 적극 다가간다고 했다. 동시에 세심한 배려와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곁들였다.
박 목사는 귀한 성도들의 헌신과 사랑에 감사한다며 코로나 기간에 동료 목회자들을 통해서도 위로를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비슷한 입장에 있는 목회자들이기에 동병상련의 마음일 것이라고 했다. 다같이 힘든 처지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자책하기 보다 따뜻한 말과 품으로 서로를 안아줄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도 언제든 오라며 호텔 뷔페는 못 가더라도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은 언제든 대접할 수 있다고 미소지었다.
■ 선교와 구제에 함께 하는 비전교회의 미래 비전
박근식 목사 가족
소망교회는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평균 25명 내외가 모이는 작은 공동체다. 박 목사는 자신들은 비전교회로 불리지만, 어느 순간 ‘교회가 아니라, 목사인 나만 미자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비록 소망교회가 상가교회지만 지난 강원도 산불재해 당시에 구호헌금(80만 원)도 했다. 또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평화기금 등 특별헌금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매월 선교사 세 가정과 비전교회 목사 한 가정을 정기적으로 돕고 있기도 하다. 자신들도 비전교회이면서 지원이 필요한 곳으로 사랑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비전교회지만 성도들의 헌금으로 교회의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월세, 관리비 등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다만, 박 목사의 생활비는 교회에서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소량의 목회비만을 받고 있었다. 박 목사는 이마저도 감사하다며 ‘텐트메이커’였던 바울을 생각하면서 ‘자립사역’에 대해 부인과 함께 진지하게 고민한다고 전했다.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는 목사가 되는 것이 지금 당면한 과제라고 말하는 박 목사에게서 젊은 목회자의 패기에 찬 정의감을 보는 듯 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목회자의 자립이 교회의 비전이라니 형용모순의 함정이 아니길 바란다”고 말했다.
소망교회가 위치한 신월동 지역이 재개발 구역으로 확정되어 몇 년 안에는 무조건 이사를 해야 한다. 교회 근처에 지리한 주택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다며 청년 교인들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뿌리를 잘 내려가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매주일 설교할 수 있고 그 설교를 들어 주는 교우들이 있다는 자체가 행복하다는 박 목사의 고백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박 목사의 바람대로 ‘작지만 강하고 건강한 교회’가 우리 주변에 많아지기를 기도하며 상가 3층의 소망교회를 떠나는 발걸음이 가볍고도 무거웠다.